'내일 피는 꽃' 이종찬의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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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12일 인간이 사라진 시대, 휴머니즘의 복권을 요청하며 대학원신문-문화·서평 257호dog's ear2009년 03월 06일 (금) 12:45:07이종찬 / 영문학과 박사과정 .인간이 사라진 시대, 휴머니즘의 복권을 요청하며일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 의 저자 정도로만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의 후기 면모를 살펴보고 의아해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위대한 예술’에 끌린다. 왜 그런지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을 남기며 일견 ‘정치’와 거리를 두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 연구자 바트 무어 길버트는 사이드의 이런 변화가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정치와 예술을 독립된 별개의 항으로 구분하려 했던 불가능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치와 예술은 그리 쉽게 갈라설 수 있는 개별항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은 항상 이미 윤리로서의 정치를 말해왔다. 최근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로 주목받고 있는 신형철은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라고 말했다. 신형철의 주장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에 대한 논리적 반증으로 쓰인 것이다. 고진은 오늘날 문학이 비명횡사한 근거를 정치의 소멸 혹은 부재에서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고진은 바트 무어 길버트가 범했던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미시층위에서 문학과 예술이 윤리(의 정치)와 무관했던 적은 결코 없다.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했던 것이다. 신형철의 이 정당한 ‘윤리(의 정치)’를 나는 휴머니즘의 요청으로 이해했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가 구조주의자답게 ‘반-인본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이래 역사의 뒤안길로 초라하게 밀려나버린 저 휴머니즘 말이다. “어떤 것이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공격하는 것이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해체해버리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저항의 인문학 )는 사이드의 의미심장한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오늘날 냉소와 무기력이 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 돼버린 지 오래다. 이는 ‘정치(의 윤리)’만을 강요하면서 ‘인간’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내게 신형철의 ‘윤리의 정치’ 테제와 사이드의 휴머니즘 테제가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때문에 문학이, 인간이 사라진 이 시대에 나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이게도 휴머니즘의 복권을 꿈꾼다. 나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흔들림없이 믿고 있다.ⓒ CAUON(http://www.cauo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2009년 02월 28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_2부. 연인들의 공동체 中 후반부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역, 문학과지성사, 2005. “Ⅱ. 연인들의 공동체” 중 후반부 (71-90쪽) ● 책임의 강제는 자유와 존재 이전의 것이다(71). 정념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에 우리를 더 이끄는 타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1)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목숨을 건 도약’의 경우, “오직 서로 사랑하는 자들[만]이 타인을 위한 죽음에 동의한다.” 또한 알케스티스2)의 예가 있다(72). 그녀에게는 불멸성 이외에 사랑의 다른 목적은 없었다. 사랑에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죽음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삶을 끊임없이 타자를 위한 것이 되게 만들지만 아무 영광도 없는 초월성을 삶에 부여하기 위해서(73). 영혼의 아프로디테도 육체의 아프로디테도 아닌, 가장 적게 언급된, 가장 두려운 아프로디테, 그렇기에 가장 사랑받은 세 번째 아프로디테가 있다(74). 연인들은 죽음의 산개(散開)와 마주하게 된다.3) “불멸이란 독에 의해 / 여자의 정념이 완성된다.”(75) ● 연인들의 공동체, 이 낭만적인 제목은 물론 모순이다. 그러나(75). 전통적인 공동체와 선택적 공동체를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는 결정의 자유와 상관없이 땅․피․인종에 대한 찬양의 근거가 된다. 반면 두 번째는 연인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존재들의 경련적인 움직임”(바타유)이 출현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들을 일반 사회로부터 끄집어내 육체와 마음과 생각으로 (둘씩 또는 나아가 집단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도록 끌어당기는 어떤 움직임이다(76). ●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 그곳에 우주 무화(無化)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재난의 가능성이 있다(78). 뒤라스는 정념의 진부한 유희에 몰두한 사드를 재현한다. 즉 그녀는 무감각, 무감정, 무기력이 연인들에게 가져온 하나의 결과를 보여준다(79). 두 인간 존재들은 오직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어떤 점에서는 찬양하기 위해) 결합되기를 시도한다.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항상 이루어지는 이 결합에서의 착각(79).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공허의 내밀성을 거쳐 어떤 공동체를 형성한다. “연결되어 있기를 받아들이는 결국 단 하나의 삶, 즉 표현 불가능한 삶.”(르네 샤르)(80)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텍스트에서 그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 안에 있는 어머니를 다시 근친상간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 정당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이런 또는 저런 여자로 특징짓게 할 모든 특수성을 넘어서서 절대적 여성성에 이르렀다(81). “무엇을 위해 노력하죠?” “당신은 말한다. 사랑하기 위해.” 그의 대답은 순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4) 또한 감동적이다. 순진함 속에서 그는 사랑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들보다 아마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이 두 존재 사이의 공동체는 가장 놀랍지만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공동체다(83). 그녀는 그의 반(反)베아트리체다. 명백한 무감각에 따르는 관계만이 있을 뿐이나, 무감각으로 인해 뭐라 말할 수 없는 쾌락으로 나아간다(84). ‘그 자신의 방’에 그녀가 있지만, 그것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연인들의] 공동체가 와해될 때, 공동체는 설사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인상을 가져다준다(85). ● 공동의 것이 될 수 없는 낯선 것이 영원히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이미 떠나 있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세운다(86). 그는 그녀에게 세계에 대해 말해주고,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자는 데 리듬을 부여하는 새벽 여명에 대해 말해준다(86).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나에게 물어보세요. 나로서는 할 수 없어요.”(87)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간직하기를 항상 원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적’ 오류를 범해서라도 간직하기를 원하는 사랑하지 않을 자유. 그는 자신이—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한 명의 여자도 사랑하거나 욕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결국 스스로 알기에 이른다. 그러나 반대의 사실이 입증된다(87). 그는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를 마음대로 다”루는 대신, “그 육체가 행복이 가져다주는 위험을 감수할 때 드러내는 부드러움과 똑같은 부드러움으로 그 육체를 애무한다.”(88) 그 여성적인 것은 괴테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테의 지상적이고도 천상적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진부한 모방이 아니다. 이후 그는 “그녀를 취한다. 그것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자기 시작한다.” “그녀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88) 그녀의 사라짐은 오기도 전에 잃어버린 사랑의 추억을 그에게 남긴다. 그는 성스러운 현전이 그를 떠나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 현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89).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는 너무나 유명하고 지나치게 되풀이되어온 경구를 남겼다(89).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침묵하기 위해 [침묵의] 말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그 물음에 우리를 구속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90). community_inavowable.hwp 2009년 02월 25일 모리스 블랑쇼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 (박준상) 박준상, 『바깥에서―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인간사랑, 2006. 2. 공동체 없는 공동체 (69-120쪽) ● 바깥에서 ‘나’(l'un)와 타자는 비참하지만 찬란한 유한성(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공동의 증인으로 남는다. 찬란한 유한성, 왜냐하면 유한성을 통해서만 인간은 급진적 소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70). 바깥은 어떤 매개물이 아니라 공동존재의 조건이다.(바깥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급진적이며 진정한 관계는 설사 어떤 매개물과 관련이 없지 않더라도 그것을 초월한다. 만일 어떤 매개물을 통한 결합이 관계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을 때 관계는 필연적으로 왜곡된다.)(71) “어떤 공동체도 이루고 있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또는 “공동체 없는 공동체”, “부정(不定)의 공동체”, “무위(無爲)의 공동체”(낭시)는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동사적 사건(관계맺음, 관계의 열림의 사건)을 가리킨다(72). ● 블랑쇼의 ‘정치적인 것’이 문학작품을 매개로 한 소통(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 여전히 강조된다(73). 1. 분리 가운데서의 타자와 나 ● 블랑쇼의 사유는 끊임없이 레비나스의 사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74). ●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불규칙하고 지속되지 않는 시간성에 따르고 있다(75). 타자는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모든 힘의 행사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조형적 이미지를 넘어서면서 어떤 형상과도 일치하지 않는 타자의 현전(présence de l'Autre)의 권위에 의해 가능하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e l'Autre) 자체를 구성한다(75-76). 블랑쇼는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들이 처했던 상황을 예로 든다. 왜 나치는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 내몰린 자에 불과한 그의 제물 앞에서 냉정하게 그것을 다룰 수 없는 것일까? 여기에 타자의 현전이 반유태주의라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순간이 있다(76). 나치의 지배에 한계가 주어지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고문당하는 자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타자의 현전은 나와 타자를 최후의 차이 속에 남겨 둔다(76-77). 나와 타자는 돌이킬 수 없이 분리(séparation)되어 있다. 허나 이때 분리는 분리 가운데에서의 소통의 주의를 요구한다(78). 2. 책임성으로부터의 소통 ● 타자는 이미 가까움(proximité), 비무관심성(non-indifférence)에 의해 관계 가운데 놓여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책임성(responsabilité)이라는 말로 정의한다(79). 레비나스는 어떤 주체성을 옹호한다. 주체성, 다시 말해 “타자를 위한 나의 대속(substitution), […] 자아(Moi)의 폐위(廢位)로서의 자신(soi)의 설정, 단일성으로서의 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그 이하의 것,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무관심성으로서의 차이”, 그것은 책임성에 기입된다. 레비나스에게 주체성은 그것이 책임성인 한에서 주체성이다(80).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상호성(réciprocité)을 배제한 채 타인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80). 나와 타자의 관계는 양자의 불평등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비대칭성(asymétrie)’이라 부른다. 타자의 현전 앞에서 나는 다만 그것에 응답해야 할, 타자를 환대해야 할 위치에 있을 뿐이다(81-82).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자아(moi) 너머의 주체(sujet)이다. 나는 나의 한계 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책임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무한의 이념에 정초된다(82). 3. 타자의 현전: 레비나스와의 대화 ● [자아의 경우 즐김과 욕구 사이의 순환과 왕복] 레비나스에게 자아(le moi)는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김(jouissance)을 위해 활동한다. 즐김이 자아의 사물들과의 원초적인 관계를 구성한다(나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살기 위해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다). 즐김은 욕구(besoin)에 의해 배가된다(83). [거주하는 자아] 즐김의 형식은 언제나 ‘…을 즐김(jouir de…)’, 또는 ‘…으로 살아감(vivre de…)’이다. 자아는 어떤 장소[‘세계(monde)’]에 ‘거주(le chez soi)’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에의 요구와 함께 발생한다(84). 여기에 에고이즘이 있다. “…에 의존된 삶 또는 즐김.” 하지만 레비나스에게 자아의 거주는 내가 타자를 환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85). 자아는 이미 세계에 놓여 있다. 바깥에서 “‘내’가 ‘그 자신’[비인칭]을 알아보지 못한다(86).” ● 그런데 블랑쇼는 즐김으로 즉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86) — 극단적 고통의 욕구, “헐벗은 삶과의 적나라한 관계”, “즉각적으로 살려는 욕구.” 블랑쇼는 이를 “메마른 욕구” 또는 “즐김이 배제된 욕구”라고 표현한다. 이는 삶에 대한 욕구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닌 욕구, 삶에 대한 비인칭의, 익명의 적나라한 욕구이다(87-88).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또 욕구와 반대로 바깥에서, 모든 세계의 타자에서 발생된다(89). [욕구의 익명성] 바깥에서는, 자아와 그 자신의 관계가 세계의 부재로 인해—거주의 불가능성으로 인해—좌절된다. 다시 말해 바깥에서 욕구의 비인칭성에 묶여 자아는 비인칭의 인간 또는 익명의 인간으로 전환된다(자아의 타자화의 사건). 거기서 나는 어느 누구(quelqu'un)로 대치된다. 살아감(vivre) 또는 생존함(survivre)은 ‘…으로 살아감’과 차이가 있다. 살아감은 ‘그저 살아감’이거나 ‘아무 것으로나 살아감’일 것이다(89).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누구를 위함인지 모를 에고이즘’, 또는 “에고 없는 에고이즘”(블랑쇼)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생존에, 비천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그 언제나 삶에 집착한다. 즐김이 배제된 욕구는 중성적인 욕구, 우리들 모두의 욕구로 드러난다(90). 내 안에 누군가의 현전이 그려진다. 그 현전은 나에게 무한의 현전으로 제시된다(91). 그 현전은 세계로부터의 추방, 바깥으로의 망명이라는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블랑쇼는 이 멀어짐을 세계의 중성화라 부를 것이다(93). 4. 타자를 위한 ‘나’ ●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그가 ‘얼굴(visage)’이라 부르는 현전이다. 이는 비대칭성에 근거한다(얼굴을 통해 타인은 마치 과부나 고아처럼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한 자로 나타난다)(94). 레비나스에 대한 블랑쇼의 반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비대칭성(asymétrie)을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95). ●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타자에 대한 책임성에 부합되는 나의 주체성에 그 모든 무게가 걸리는 과도한 윤리가 아닐까.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어떤 대자를 향한 은밀한 열망, 어떤 자기의식의 우위에 대한 확인, 일종의 나르시시즘 또는 유아론(唯我論), 어떤 대자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95-96). 레비나스의 주체성의 주체는 “피와 살을 가진” 주체, “배고프고 음식을 취하는, 피부 안에 내장을 가진, 입 안의 빵을 줄 수도,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인간”이다. 그 주체성은 ‘전-근원적으로(pré-originellememt)’ 알려지며, 레비나스가 ‘감수성(sensibilité)’이라 부르는 타자에로의 수동적 이끌림이다(98).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영혼의 현상(psychisme de l'âme)”으로 귀착된다. 영혼의 현상은 타자의 현전에 따라 내가 감당하는 나의 단일성(unicité)이다. 영혼의 현상은 자신의 ‘포기(abdication)’와 혼동될 수 없다. 그 너머이며, 자기 ‘희생(abnégation)’이다(99-100). ●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유아론과 정반대되는 철학”, 그러나 “분리[가운데에서의 소통]를 말하는 철학”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고립된 자아의 존재가 아닌, 어떤 공동존재를 전제로 한다(100). 나로 하여금 타인을 환대케 하는 주체성,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 이미 들어가 있을 때만 유지되는 주체성이다(101). ● 레비나스의 윤리는 의식의 모든 작용이 유예된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과격하다(101). 그러나 하나의 윤리정치적 담론의 기초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102). 5. ‘우리’를 위하여 ●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일방적인 비대칭성(윤리적 관점에서 나에 대한 타자의 우위)은 항상 유지될 수 있는가?(103) 우리는 비대칭성을 감당할 수 있다. 인간은 타자가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 다만 자신의 자아라는 위치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자신이 의식 그 이하에서 타자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파괴될 수 없는 휴머니티를 견지하고, 인간 자신의 부수어지기 쉬움 속, 하지만 파괴될 수 없는 현전을 표현하려 한다(104). 그럼에도 불구 블랑쇼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일방적 대칭성(타자의 나에 대한 윤리적 차원에서의 일방적 우위)이 급진적인 소통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일 수 있는가를 의심한다(105). 레비나스에게서와는 반대로 블랑쇼에게서 타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타자의 현전을 부르는 자는 관계의 한 축인 타인만이 아니다. 관계를 이루는 축은 ‘나’와 타자, 둘로 시간성에 따라 이 타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106). ● 레비나스의 주체성에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정된 위치에, 타자를 위한 ‘볼모’의 위치에 묶인다. 그런데 타자가 나를 그의 파괴적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나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 없다. 타자는 나에게 잔인한 주인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107). 그러나 나를 박해하는 잔인한 이기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여전히 그를 감당해야 한다면, 이는 내 안에 그려지는 타자의 현전을 보존하기 위해서다(108). ● 나는 타자에게 변증법적이자 비변증법적인 항의(contestation)로 단호히 저항해야만 한다. 지배자로서의 타인에 대한 나의 항의(109)는, 타인과 내가 인간류에 속한다는 궁극적 공동체의 감정이 갖는 비변증법적[비-상호적]인 요소로 인해 가까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111). 반대로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은 주인의 위치에 올라 자율적 자아로 인정받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투쟁까지 감수하려는, 상호의존적 관계에까지만 머무른다(111). 이 경우 나는 지배주의적 자아(Moi)는 아니고, 다만 세계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자아(moi)일 것이다. “졸이 모든 종류의 말이 될 수는 있지만 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변증법-비변증법적 항의는 “공동-내의-존재(être-en-commun)”에 대한, 의식 너머의, 의식을 가로질러 가는 열망, 정념(passion)이어야 한다(112-113). ● 변증법-비변증법적 항의를 블랑쇼는 ‘거부(refus)’로 표현한다. 거부는 힘 있는 말인 동시에 또한 무력한 말이다. 다만 중얼거리기(murmurer)만 하는 어느 누구인가의 말(parole de quelqu'un)이다. 따라서 거부는 어떤 법의 비호 아래 아직 모일 수 없는 자들의 말, 공통의 독트린, 조직, 기관을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결코 눈에 띄지 않는 말이다(113-114). ● 블랑쇼에게 [레비나스의] 주체의 문제나 주체의 주체성의 문제는, 우리의 관계나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보다 덜 중요해 보인다(114). 6. 공동체 없는 공동체 ● 블랑쇼에게 실존의 근본적 조건은 레비나스의 나에 대한 타인의 윤리적 우위, 즉 비대칭성으로 정의되지 않는다(116). 블랑쇼는 대신 나와 타인의, 인간들의 관계의 조건을 ‘이중의 반대칭성(double dissymétrie)’이라고 부른다. 타인이 나에 대해 타자인 것처럼 나 역시 타인에 대해 타자이다. 결국 이중의 반대칭성(나에 대한 타인의 비상호성(irréciprocité)(118)은 (일방적) 비대칭성보다 나와 타인의 관계의 실존적 조건을 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117). 비대칭성의 윤리성이 무시될 수 없는 가치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항상 이중의 반대칭성이라는 실존적 조건에 따라 이해되어져야만 한다(118). ● 나와 타인은 함께 타자의 현전을 향해 나아가되, 타자의 현전이 누구[‘나’ 혹은 타인]에게서 발생하든지, 그 단수성(singularité)을 나누어 갖기 위해 나아간다. 나와 타인은 제3의 인물이라는 공동의 지위에 속한다. 이 비인칭적, 익명적 탈존을 블랑쇼는 “그(le ll)” 또는 “그 누구(le On)”라고 부른다. ‘그’는 그 모두의 타자,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Autre)를 제시한다(119). 그것은 상호적이 아닌 평등, 무정부주의적·종말론적 평등, 블랑쇼가 ‘우정(amitié)’이라고 부르는 평등일 것이다(120). blanchot_community.hwp 2009년 02월 20일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 머리말 2장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이성규 역, 범우사, 1997. ● 머리말: 아웃사이더, 그 후 20년책을 쓰겠다는 계획의 뒤에 숨어 있는 주요한 힘들 가운데 성(性)이 하나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11). 나의 소설 《어둠 속의 의식》에서 소름은, 우유를 들고 난간을 지나가는 어떤 여자의 치마를 올려다본다(12). 내게 성적 욕구는 물에 대한 깊은 동경을 생각나게 해주었다(13). 유명해지고 나서 얻은 가장 큰 보너스는 아마도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의 증대였을 것이다(21).이 책의 출간 직후 언론은 내가 적어도 사르트르와 까뮈만큼이나 중요한 실존주의자며, 영국에서 성장한 실존주의자라는 점을 확신시켜주었다(19).이제 나는 《아웃사이더》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안다. 내가 마침내 진지한 삶의 방식을 취하게 됐고, 내가 어린 시절의 지속적이고 엉망진창인 세월을 보내고 자의식으로 가득 찬 10대의 번민을 겪은 후 마침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6). ● 제 2장. 무가치한 세계‘아웃사이더’는 실존주의적인 말로 자기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중요한 단 하나의 구별은 ‘존재와 무’이며, “죽음, 그것이야말로 모든 관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바르뷔스; 1장 참조)고 하는 그것이다(54).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감정 문제에 무관심하다(57). 하지만 처형 전야에 그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뫼르소의 무관심의 이유는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의 비현실감에 있었다(59). 뫼르소는 늦었지만 자유의 의미를 깨달은 듯한데, 이 자유는 비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사르트르는 뫼르소의 이 깨달음을 요약하여 후에 “자유라는 것은 공포다”고 공식화했다. “그가 가장 자유롭게 느꼈던 것은 전쟁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끊임없는 배반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사르트르, 〈침묵의 동맹〉) 자유는 ‘의미의 강렬함’이며, 살아남으려 하는 의지를 인간에게 불러일으키게 하는 극한상황에서 나타난다(60). 카프카의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인생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자! 이것은 어때?”라고 하는 운명의 철퇴를 맞는다. 그 명령은 “너의 자유를 요구하라”는 것 같다. 자유를 요구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돌연 재판과 처형을 받게 되거나 심지어는 하등동물로까지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60-61). 뫼르소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병사의 고향》에서 크레브스는 다르다. 그는 전쟁 체험에서 자유의 감정을 획득했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온 자신의 생활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지 하나, 남자로서 할 수 있는 단지 하나의 일”을 제외하고서다. 자신의 일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보았다는 것, 그것이 자유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제이크 번즈의 상황, 생식기에 받은 상처는 실현될 수 없는 자유의 비극을 상징한다(63).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는 공포다”, “자유는 위기다”라는 말에 헤밍웨이는 동의한다. 다만 헤밍웨이는 영웅적인 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데, 그는 낚시질에서, 미시간 숲속의 사냥에서, 날마다 자신의 운명을 거는 투우사에게서 그것을 찾는다(64). 《무기여 잘 있거라》 이후 헤밍웨이의 작품에서는 초기의 발랄함은 없어지고, 차가운 느낌을 피할 수 없다(65). 프레드릭 헨리는 간호사 캐서린에게 일종의 거짓말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헨리가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달은 것은 나중에 부상당한 그가 밀라노의 병원에 누워있을 때다. 절정은 캐서린 바클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 대목이다(67). 헤밍웨이는 체내가 싸늘하게 갠 것 같은 느낌을 주던 이 체험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68). 헤밍웨이의 해결방법은 사냥감을 찾거나 심해에서 낚시질을 하는 것, 내란이 발생한 에스파냐에 참가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문제의 근원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아웃사이더’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룬 것이 있다(67). 캐서린의 죽음에 의하여 궁극적인 부정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기분은,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기분에 비하여 성숙한 깨달음이다. 남아있는 유일한 가치는 용기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68).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답게가 아니라 동물처럼 죽는다.”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른바 휴머니스트의 죽는 모습이다. 그들의 고귀한 퇴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69-70).”헤밍웨이의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문장은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문장이지만, 그보다는 “잃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제가 오래도록 증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생이야말로 유일한 가치라고 그는 주장한다(70). 까뮈는 인간의 자유 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해답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결론짓는다. 이 때문에 ‘참여’ 이론의 사르트르와 심하게 충돌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헤밍웨이에게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자유의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다(72). 할리 그랜빌바커의〈숨겨진 생명〉에서, 전전(戰前) 정계에 있었던 에반 스트로드는 당의 지도자와 다투고 은퇴했는데, 전쟁 후 당이 그의 복귀를 바라고 있다. 올리버 곤틀렛은 의아해한다. 스트로드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74). “빌릴 것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것도 없는 대의명분의 힘, 그것은 그들[현실 정치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그것은 숨겨진 생명으로부터 솟아나옴에 틀림없소(76).” 전쟁 전 스트로드와 연애를 했던 여자 조안 웨스트베리는 “그런 희망이 없는 회의에서 벗어나세요”라고 말한다(77). 아웃사이더는 지금까지 알았던 어떤 현실보다도 고차의 현실을 잠깐 본다. 그러나 곧 그것을 잃어버리고 차선의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77). 올리버는 “그러한 성공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한 겁니다. 그렇지만 에반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물의 핵심에 파고들려고 했던 거예요. 그것은 완전히 죽어버린 사물의 핵심”이라고 말한다(78). 올리버의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파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진정한 파괴입니다(79).” 올리버나 스트로드에게는 세간에 대한 파스칼적인 멸시,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꿰뚫어볼 힘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랜빌바커에게,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세간을 멸시하는 인간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을 계속해서 고안해내는 일 이외에는 거의 없다(80). “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소서(82).”(스트로드) 우주에 있어서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한 사상을 말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가 저녁이 먹고 싶어졌다거나 버스에서 아이가 울면 화가 나기도 한다면, 그러한 사상은 모두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사소한 일에 얽매여 있다. 스트로드도 올리버도 과민할 만큼 이억세 마음을 쓰고 있다.(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할만큼 그들은 강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다(83). outsider_chapter_2.hwp 2009년 02월 18일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 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이성규 역, 범우사, 1997. 제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18세기 및 19세기의 합리주의 시기처럼 철학자들이 공개 말타기 대회의 카우보이같이 행세하고 있는 세기에 태어난 아웃사이더는 (까뮈나 사르트르와 같이) 허무적인 페시미스트일 수는 없다(86). 플라톤적 이상가이며 꿈을 꾸는 사나이라 자칭하는 아웃사이더에게 부르주아들은 기꺼이 그의 존재의 권리를 인정해준다. 이리하여 아웃사이더는 사회질서 안에서 비실제적인 몽상가로서 자기 위치를 차지한다. 비실제적 몽상가의 경향은 젊은 베르테르가 등장하여 심정상의 혁명을 일으킨 사건에서 비롯된다(87).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별세계를 꿈꾸는 자’이며, 본질적으로 몽상가이며 공허한 날을 노래하는 한량이다. 그는 자기의 환경이 자기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데 주로 관심을 둔다(88-89). [사르트르와 같은] 리얼리스트적 아웃사이더는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어디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90). 구토 의 사르트르는 잠시라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조이스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91). 이 장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다루는데, 영어 상용국에서 헤세 업적의 위대함이 거의 인정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작품은 빌둥스로만, 즉 교양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92). 근대에 최초로 나타난 아웃사이더적 우화인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 에서 ‘행복의 골짜기’라 불리는 유토피아 사회에 사는 왕자가 권태와 초조감에 시달려 바깥세계로 나간다. 그가 얻은 결론은 “나는 행복하게 되고 싶지 않다. 생생하고 활동적이길 바란다”이다(93-94). 수레바퀴 아래서 이후 3년간 헤세의 세계관에 대변화가 일어난다. 데미안 과 이후 네 편의 작품들을 분석한다.(94) 데미안 에서 싱클레어가 암흑세계에 내려가는 것은 반드시 악은 아니며 지성과 대담성의 필연적인 표현일지 모른다. 거리의 왈패 크로머의 지배에서 해방된 싱클레어는 그러나 이전의 질서 관념으로 되돌아간다. 그렇지만 이는 혼돈에서 고개를 돌린 것에 불과하다. 혼돈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97-98). 싯다르타 에서 냇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싯다르타는 냇가에서 명상에 잠긴다. 헤세가 도달한 결론은, 궁극적으로 성공도 실패도 없으며 인생은 냇물과 같은 것이어서 흐름이 그치지 않는 데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망을 느끼며 이 소설을 접어둘 수밖에 없다(101). 황야의 이리 는 이제까지 나온 아웃사이더 연구서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도 철저한 것 가운데 하나다. 어느 중년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자체가 매우 중요한 진보다(102). 주인공 할러는 자기분열의 인간이다(104). 문명과 야만은 항상 서로 적대하며 살고 있지만, 양자가 화해할 때가 있다(105). 가령 고민 때문에 부르주아보다 생존에 부적당한 인간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그의 열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고민이 잘] 화합[?]된다면 그것은 아웃사이더의 우월을 확증하는 ‘보다 충실한 인생’을 나타낸다. 아웃사이더가 자기 힘을 자각할 때 그는 통일되고 행복해진다(105). 아웃사이더들 역시 사회에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부르주아 세계가 그 자신의 침체한 무게에 억눌려 허덕이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그들의 분투 덕분이다. 그들이야말로 사회의 정신적 추진력이다(105-106). 황야의 이리 에는 무수히 상반된 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가 존재한다.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무조건의 의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르주아 문명은 개성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106). 이 작품의 신조는 “필사적으로 자아에 매달리고 필사적으로 인생에 매달리는 것”이다(107). “자기의 세계를 좁히고 자기의 영혼을 단순화하는 대신,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최후엔 전 세계를 자기 영혼 속에 포괄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구제의 길’은 이상 명백히 제시됐다(108). 싯다르타 에서의 체험, “죽음에 이르는 좁다란 길이 어찌 되든[…]하찮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별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은 낭만주의의 궁극적으로 근거 있는 핵심으로, 일종의 종교적 긍정이다(110). 황야의 이리 에서 할러는 말하지 못했던 긍정의 말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그러한 고초를 다시 한 번 맛보고 그 무의미한 것에 다시 한 번 공포를 느끼고 싶다. 다시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내 안에 있는 지옥을 다시 거닐고 싶다. 어느 때고 이 놀음에 훨씬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111).” 헤세의 관념소설에는 도스또옙스끼에만 비교될 수 있는 활력이 넘쳐 있다(112). 지와 사랑 은 금욕주의 대 세속주의의 문제에 대한 연구서다(112). 젊은 수도사 나르치스를 떠나 골드문트가 ‘자기를 찾아서’ 수도원에서 세계로 떠난다. 방랑의 클라이맥스는 그가 버려진 교회의 벽화를 보는 장면이다. 골드문트는 생의 한가운데서 인간이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돌아온 골드문트가 죽은 뒤 남긴 조각은 무명의 거장으로서 그의 인생에 결여됐던 영원성에 도달한 것이다. 죽은 골드문트 대신 역설적으로 나르치스가 대신 그것을 깨닫는다(113-114). 낭만주의 특유의 위대한 넋두리에서 완전히 탈피한 《유리알 유희》는 미래의 어떤 시기, 즉 귀족적인 인텔리겐차 계급인 카스탈리안 계급이 국가에 의해 유지 보장되는 시기로 설정돼있다. 이 계급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적 이상이 도달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 제도로부터 지적인 태만, 거만함 그리고 자존에 빠져들 우려를 감지한 요제프 크네히트는 퇴직하여 ‘속세’로 뛰어든다. 그는 한 소년이 아침에 태양을 예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는 그 자신의 인생에 결여된 것이다. 이 최후의 작품에서도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양자 중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있다(114-115). 헤세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한 소설가이며,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진 아웃사이더다(116). 그는 인간이 미지근한 일상 범사의 차원에 생존하는 대에 깊은 불만을 품으며, 예술가가 창조시에 느끼는 법열의 강렬함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길이 있어야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낭만적인 낙관론이라 일소에 부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아웃사이더 공통의 이상이 하나로 주목할 만한 점이다(117). 2장의 [실존적] 아웃사이더들은 인생이 비현실성이 고통을 주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절히 느낀다. 그러나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117-118). 그런데 별안간 스크린 위 환각은 사라지고, 거기서 전개된 사건의 인과적 연관이 단절되어 그들은 가공할 만한 자유에 직면한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의 선고’를 받는다. 마침내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스크린의 세계가 환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관의 세계 또한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고약한 가능성이 생기고 만다(118). 자기실현의 문제, 즉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는다(121). outsider.hwp 별들은 연기를 뿜고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그야 내가 미쳤죠.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어둠이 촛불에 몸 씻듯이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귀 밝아오노니, 지하수 같은 울음소리.. by cy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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